Updated : 2024-05-04 (토)

(장태민 칼럼) 추경불호

  • 입력 2023-06-09 10:57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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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4월 및 누계 국세수입 현황, 출처: 기재부

자료: 4월 및 누계 국세수입 현황, 출처: 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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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전날 방송에 출현해 자신은 추경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추 부총리는 자신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추경에 대한 반감(?)을 나타냈다.

부총리는 자신이 늘 재정건전성을 주시하고 또 이를 중시하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그는 "재정건정성 때문에 (과거에도) 추경을 반대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추경호라고 부르지 말고 추경'불호'(不好)라고 불러 달라고도 했다"고 소개했다.

■ 추경호와 추경불호

전날 오전 방송 진행자는 추경호(好) 대신 추경오(惡)로 이름을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농담을 섞은 질문은 별다른 웃음을 유발하지 못한 실패작이 됐다.

추 부총리는 과거에도 자신의 이름을 활용해 추경에 대한 입장을 전하곤 했다.

기재부 차관을 지낸 뒤 국회의원이 된 이력, 그리고 자신의 이름 때문에 추 부총리는 추경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자신이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데다 최근 수년간 추경이 일상화됐기 때문에 그는 경제부총리가 된 뒤 '일상화된 추경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어했다.

추 부총리는 자신의 이름 '추경' 다음에 붙는 어려운 말 오(惡)보다는, 사람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는 불호(不好)를 택하겠다면서 추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 추경의 일상화

추 부총리는 추가경정예산(추경) 얘기를 쉽게 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부총리는 추경의 본래 취지도 강조하고 싶어했다.

실제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추경은 전쟁·대규모 재난 상황과 경기침체·대량실업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으로 돼 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추경을 얘기하지만 법에서 얘기하는 추경 요건은 상당히 까다로운 셈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무려 10번의 추경 편성이 이뤄졌다.

코로나 사태가 터져 추경이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한 해 평균 두 번씩 추경을 편성할 정도여서 '추경이 지닌 특수성'은 빛이 바랬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던 2020년엔 1961년 이후 59년 만에 처음으로 연 4차례 추경을 했다.

하지만 전염병 사태 전부터 이미 추경은 일상화됐다.

2017부터 2019년까지도 추경은 매년 1차례씩 이뤄졌다.

특히 2019년의 경우 미세먼지 대응 등이 추경 사유로 거론돼 특히 '법 위반'논란이 심하게 일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추경 편성 사유를 나열해 보면 △ 일자리 △ 민생안정 △ 청년 일자리 △ 산불과 지진 피해 지원 △ 미세먼지 △ 경기 어려움을 예상한 선제대응 △ 코로나 19 위기 극복과 지원 △ 재난지원금 지원 △ 포스트 코로나 대비 △ 소상공인 지원 △ 취약계층 지원 △ 방역 지원 △ 고용 악화에 대한 대응 등이다.

사실상 법이 규정한 '예외적 경우에 행하는 추경'이라는 취지가 무색해졌다. 추경 요건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어서 법 조문은 사실상 사문화돼 버렸다.

■ '추경불호'의 추경 최대한 늦추기

전날 추경호 부총리는 '하반기에 추경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현재로선 전혀 검토하지 않는다. 당분간 검토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부총리는 "당장 세계잉여금, 지출 효율화 등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정부는 살림을 살면서 가급적 나라 빚을 더 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장은 추경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국가재정을 이끌어가겠다는 뜻이다. 아직 세금 관련한 돈이 얼마나 들어오고 나갈지 불확실하다는 점도 거론했다.

그는 "8월, 늦어도 9월초 공식적으로 세수를 재추계한다. 현재로선 어느 정도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올해 4월까지 세수가 34조원 가량 부족한 상황에서 나라 살림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부총리는 무슨 핑계만 생기면 '추경'을 언급하는 풍토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부총리는 결국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습관성 추경을 생각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추경은 불가피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사실 이날 부총리의 추경 편성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에도 '당분간', '현재로선'과 같은 토가 달려있다.

추경 편성에 따른 국채 공급물량에 민감한 채권시장은 추경에 부정적인 부총리의 말에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 역시 현실적으로 추경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한 채권 딜러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부총리가 추경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한 부분은 채권시장이 우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금이 덜 걷히는 부분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이러니 다들 결국 추경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지요."

정부가 최대한 추경을 늦춘 뒤 마지못해 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란 예상은 채권시장의 일반적 관측이다.

■ 돈 쓰는 재미와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돌아가는 일의 어려움

민주당은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나라빚을 GDP의 40% 이내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다그치곤 했다.

하지만 막상 국가살림을 맡게 되자 40%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예산을 늘려 확장 재정의 즐거움을 맛봤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실제 돈은 더 필요해졌으며, 확장재정의 논리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결국 60%까지 빚을 늘려도 된다는 이론으로 갈아탔다.

작년 초 대선이 막바지 총력전을 벌일 때는 여와 야 가릴 것 없이 '표 매수 행위'가 유행했다.

입으로 먼저 돈을 건네는 금권선거에 준하는 타락한 이벤트였다.

특히 당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긴급재정명령권'까지 꺼내 들기도 했다.

이 후보는 "당선 시 50조원 이상의 긴급재정명령에 서명하겠다"고 했다.

긴급재정명령권은 대통령이 재정·경제상 위기로 긴급 조치가 필요할 때 국회 승인 없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헌법상 권한이다.

권한 발동을 위해선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헌법 제76조 1항 규정)'가 있어야 한다. 긴급재정명령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시행한 때 이후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포퓰리즘이 일상화되면서 돈 나올 구멍 따지지 않고 돈 쓰는 게 정치인들 사이엔 최고의 미덕이었다.

어차피 내 호주머니가 아닌 국민들의 돈으로 국민들에게 선심쓰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봉이 김선달의 후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 빚이 빠른 속도로 늘면서 '건전재정'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번 키워놓은 재정의 덩치를 줄이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에 경제가 어려워져 세금이 제대로 안 걷히니 다시 또 빚을 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한국은 올해에도 60조원에 달하는 적자국채까지 발행해 나라살림을 살고 있다.

■ '외세'가 나라살림 걱정해주는 아이러니한 상황

한국은 미래를 팔아 현재를 즐기는 나라다.

일각에선 한국의 인구 구조와 국가의 돈 씀씀이를 보고 있으면 폭탄 돌리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말로는 그럴듯하게 미래를 걱정하는 듯 하지만, 실제 행동은 우리 세대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이다.

정치인과 정부는 빚을 미래에 떠넘기면서 없는 사람 위하는 척 하는 코스프레에 도가 턴 사람들이었다.

이러자 문재인 정부 후반부부터는 IMF와 같은 '외세'가 오히려 한국 재정 상황을 크게 걱정해 주곤 했다.

한국의 정치인들 중 여전히 '돈좀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외세는 여전히 한국이 재정상황을 지금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본다.

최근엔 OECD도 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한국은 재정건전성을 높여야 하는 나라로 지목했다. 아울러 정치권에서 맴돌고 있는 '재정준칙'과 '연금개혁'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세계를 둘러보면 한국과 같이 '큰' 나라가 재정준칙 없이 나라살림을 사는 경우는 없다.

OECD는 이달 7일 한국에 대한 정책권고에서 "한국은 급격한 인구고령화에 대응해 재정건전성을 제고할 것을 권고한다(Against the backdrop of rapid population ageing, fiscal consolidation should proceed)"고 했다.

IMF·OECD의 충고나 훈수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급격히 늘어나는 국가부채와 젊은층 인구 소멸은 한국경제가 맞이한 큰 도전이다.

한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오래 사는 게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저출산고령화'가 문제가 아니라 '저출산'이 문제다. 한국은 '미래에 세금 낼 사람'이 소멸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다만 돈을 쓸 때는 써야 한다. 취약계층을 타게팅한 지원 등을 통해 반드시 필요한 곳엔 돈을 써야 한다.

물론 정치인이나 정책결정자들은 자신들의 인기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무작정 아끼려하지는 않는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한국은 돈 쓸 곳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추 부총리는 "올해 세수가 좋지 않은 게 내년에 영향 미칠 수 밖에 없는 구조지만 건전재정을 유지할 것"이라면서도 강제불용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부총리는 "작년 추경까지 포함하면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6% 줄인 것이다. 하지만 핵심 취약계층 지원과 관련한 예산증가율은 12%였다"면서 필요한 곳엔 돈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경기가 대폭 좋아져 세금이 갑자기 크게 들어오지 않는 한 모자라는 돈은 빌릴 수 밖에 없다.

한국경제 사령탑은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추경불호'로 내세울 만큼 추경에 대해 꺼리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추경을 건너뛰기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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