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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대통령이 통화정책 하는 나라 터키

  • 입력 2021-11-24 11:11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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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터키의 통화정책은 정치적이다.

우악스런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금리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브라질, 러시아가 올해 들어 각각 금리를 575bp, 325bp 올린 상황이지만, 터키는 9월부터 금리를 내리고 있다.

터키는 9월에 기준금리인 1주일짜리 레포금리를 100bp 인하한 데 이어 10월엔 200bp나 내렸다. 이달에도 100bp 내리는 등 단시간에 400bp나 금리를 인하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기준금리는 15%로 정상적인 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 철권통치자 에르도안

3~4년 전 한 터키 출신 기자를 만났을 때 그는 귀화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이 기자는 현재 유명 방송인이 돼 한국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다.

한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가 대뜸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에 비하면 그는 민주주의자나 다름 없습니다."

이 방송인은 현재 한국인 부인의 도움으로 귀화했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이국 땅에서 '뭘 해서 먹고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이 터키 기자가 '독재자'라면서 맹비난했던 에르도안은 여전히 각종 정책에서 완력을 행사하고 있다. 통화정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에르도안의 눈 밖에 나면 중앙은행의 정책가들은 잘리기 일쑤였으며, 터키의 화폐는 점점 더 그 쓸모를 잃어가고 있다.

■ 어려워진 터키 경제와 종신집권 노리는 대통령

터키는 2018년 미국과의 갈등으로 외환위기를 맞았다.

당시 한국 금융시장에서도 터키에 투자했다가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뒤 2020년 코로나 사태까지 터지자 터키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자 실업률은 두 자리수로 뛰었다.

한국에도 터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코로나 사태는 터키 GDP에서 10% 넘는 비중을 차지하는 관광산업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딱히 경기를 회복시킬 방도를 찾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사욕(私慾)은 끝이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영구 집권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경기 부진의 책임을 남에게 돌려야 했고, 또 경기를 살려야 했다.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3년에 다시 대통령을 해먹어야 하는 에르도안은 자신이 직접 중앙은행 총재 대신 통화정책 운전대를 잡았다.

■ 물가 급등에도 금리 내리는 대통령

한국에선 정부가 '경제학의 상식'에 도전하는 부동산 정책을 펼쳐 큰 피해를 준 가운데 터키 정치권도 경제학을 새로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물가가 뛰는 데 금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제금융센터의 남경옥 연구원은 "현재 터키의 높은 인플레 원인은 정부의 고성장 정책에 기인하지만 에르도안은 고금리가 인플레를 유발한다는 경제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펼치면서 중앙은행에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터키에선 중앙은행가가 대통령을 요구를 듣지 않으면 경질을 각오해야 한다.

2019년 7월 금리인하 거부를 이유로 무라트 체틴카야 전 중앙은행 총재가 해임된 뒤 2년 남짓한 기간에 3명의 총재가 교체됐다.

가까이는 지난 10월에도 부총재 등 중앙은행 고위간부 3명이 해임됐다.

이제 정부 입맛에 맞는 중앙은행 총재가 나서서 정부의 논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논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만들기 쉽다.

샤합 카브즈오을루 터키중앙은행 총재는 "급격한 통화긴축이 내수위축 등 역효과를 야기시켰으며, 최근 높은 인플레의 주된 요인인 에너지 및 식품 수입가격 급등은 공급망 혼란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터키는 사실 작년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엄청나게 금리를 올렸던 나라였다.

터키는 작년 9월 이후 6개월간 4회에 걸쳐 금리는 1,075bp 인상한 바 있었다.

현재의 중앙은행 총재는 과도한 인상이 경기를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었다면서 지금의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 믿을 수 없는 통계와 엄청난 인플레 압력

터키의 전년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에 달한다. 중앙은행 관리목표의 4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수치 조차 믿음을 못 주고 있다. 실제로는 발표되는 물가보다 더 높을 것이란 추론이 잇따른다.

정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냉정한 경제적 분석은 힘을 잃고 만다.

터키 중앙은행이 높은 물가를 '대외요인에 의한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보지만, 자신들이 스스로의 말을 얼마나 신뢰할지는 의문이다.

16~17세기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누렸던 터키는 안타깝게도 현재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입물가 상승세는 당분간 이어질 수 밖에 없어 금리를 더 내리라는 대통령의 압박은 터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는 터키의 실험

달러/리라 환율은 최근 다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금리인하를 '치하'하면서 "터키가 현재 경제적인 독립 전쟁을 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달러/리라 환율은 올해 들어서 40% 이상 급등했다. 터키 돈 가치가 그만큼 급락한 것이다.

작년말 달러/리라는 7.44리라 수준에서 현재 12리라 후반대까지 치솟은 상황이다.

정치인이 '권력으로' 경기를 살릴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자국 화폐 가치를 계속해서 떨어뜨리고 있다.

터키 자산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은 당장 리라 가치가 얼마까지 떨어질지 가늠할 수 없다.

중앙은행이 나서서 시장을 추스려야 하지만, 사실상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인이 경제에 대해 조바심을 내면서 기존 시스템을 무시하고 무리수를 둘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터키 중앙은행의 금리인하 행위는 물가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

글로벌 긴축 기조라는 흐름에 역행하는 터키의 '실험'은 많은 세계인들의 우려과 기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자료: 국제금융센터

자료: 국제금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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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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