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 2025-11-03 (월)

[김경목의 월드이코노미] 쫓기는 트럼프와 느긋한 시진핑...APEC 이후 권력 무게중심 어디로 기울었나

  • 입력 2025-11-03 07:22
  • 김경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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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김경목 기자] 2025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이어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표면적으로는 ‘다자주의의 복귀’를 내세운 외교무대였지만 실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양자 경쟁의 장(場)이었다.

회담의 행보와 결과를 들여다보면, 트럼프는 쫓기듯 거래를 성사시키려 한 단기적 플레이어였던 반면 시진핑은 긴 호흡으로 판을 설계한 장기전의 전략가로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거래의 '달인' 트럼프, 그러나 피로감 묻어나는 외교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아시아 순방은 말 그대로 ‘거래의 연속’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핵심 광물 확보 협정을 맺고 일본에서는 5,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을 받아낸 이후 한국에서는 관세 인하와 투자 유치라는 실리를 챙겼다.

경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3,500억달러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단기적 성과로 보이지만, 미국 내 재정 압박을 해외 동맹의 ‘현금 투자’로 메우는 구도가 굳어졌다는 점에서 비판도 크다.

실제 한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은 화려한 의전과 선물, 상징적 제스처로 가득했다. 한국에서는 트럼프를 위한 ‘훈장 수여식’과 금박 디저트, 일본에서는 ‘황금빛 도쿄타워’와 노벨평화상 지지 선언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트럼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묵시적 압력이 작용했다.

그는 각국을 돌며 현금 투자와 무역 양보를 요구했고 이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강화했지만 동맹국들의 재정 부담과 외교 피로감을 남겼다. 결국 트럼프는 왕처럼 환대 받았지만 떠날 때는 왕의 뒷모습처럼 고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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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회담, ‘G2’ 역학 드러난 계기

트럼프 순방의 정점이자 전환점은 10월 30일 부산 김해공항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두 정상은 성대한 만찬 대신 군용 건물의 흰색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는 일부 관세를 인하하는 대신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유예와 농산물 수입 재개를 이끌어냈다.

표면적으로는 상호 양보의 균형을 이룬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진핑이 협상의 주도권을 쥔 회담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는 단기 게임의 파괴자지만 시진핑은 장기 게임의 집행자”라고 평가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시 주석은 미중 관계를 거대한 항해에 비유하며 자신감 있는 균형자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트럼프가 SNS에 “시진핑과의 G2 회담이 매우 의미 있었다”고 쓴 것도 상징적이다. ‘G2’라는 표현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전례 없는 것으로, 미국과 중국을 세계의 공동 리더로 인정한 셈이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이를 “중국의 외교적 승리”로 더디플로맷은 “베이징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으로 해석했다.

즉 트럼프는 관세 인하라는 단기적 거래를 얻었지만, 시진핑은 ‘미국과 동등한 파트너’라는 상징적 지위를 확보했다.

APEC 주인공은 트럼프가 아닌 시진핑

트럼프는 회담을 마친 직후 쫓기듯이 부산에서 곧장 출국했다.

다자회의의 본행사였던 APEC 정상회의 본회의, 기후 회담, 공급망 연합 세션 등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얻을 것은 다 얻었다”며 떠났지만 외교적 시그널은 분명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협상만 하고, 시진핑의 중국은 판을 관리했다.

시진핑은 이후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회담을 이어가며 ‘전략적 호혜 관계’를 강조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한 APEC 32차 정상회의 연설문에서 시 주석은 "세계 백년의 변혁이 가속화하고 국제정세가 혼란스럽게 얽히면서 아태 지역 발전이 직면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요소가 증가하고 있다"며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경제 세계화를 추진하는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다자무역 체제를 공동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정한 다자주의를 실천하고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무역 체제의 권위와 효율성을 높여야 하며, WTO 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고수하면서 최혜국 대우와 비차별 등 기본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미국 일방주의'를 내세우고 멋대로 관세를 부과하며 자유무역 체제를 뒤흔드는 트럼프 행정부를 직격한 것이다. 이후 시 주석은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한중 관계의 전면 복원과 통화스왑 5년 연장을 발표했다.

트럼프가 ‘관세인하’라는 즉각적 보상을 챙겼다면, 시진핑은 아시아 내 중국 영향력 확대의 장기 기반을 다졌다.

특히 한중 회담에서의 문화·경제 협력 확대 논의는 ‘한한령 해제’ 가능성을 열며 중국 시장이 다시 개방될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 트럼프의 일방적 ‘거래 외교’가 피로감을 남긴 반면 시진핑의 ‘느긋한 다자주의’는 아시아 각국에 ‘대안적 안정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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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관세 완화 vs 장기 질서 재편

경제·금융 시장은 이번 일련의 회담을 통해 두 가지 상반된 메시지를 받았다.

첫째, 단기적 리스크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미중 무역 긴장이 완화되며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이 줄었고, 원자재 및 농산물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희토류 가격은 단기적으로 하락했고 달러/위안 환율도 안정세를 보였다.

둘째, 다만 장기적으로는 힘의 균형 이동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타났다. 미국이 일방적 ‘관세 협상’에 몰두한 사이 중국은 통화·무역·자원 외교를 종합적으로 활용해 'G2' 시대의 복귀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달러 패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번 APEC 일정동안 트럼프는 ‘당장의 거래’에 집중한 반면 시진핑은 ‘역사의 흐름’을 택했다.

APEC 정상회의 이후, 두 지도자의 행보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귀국 직후 ‘관세 감세 성과’를 자찬했지만 시장은 그의 트윗보다 시진핑의 느긋한 침묵에 주목했다. 시진핑 주석은 특별한 언론 브리핑 없이 회담 결과를 사실상 ‘행동’으로 보여주며 중국 중심의 경제 질서 확장을 묵묵히 추진 중이다.

이번 APEC은 단순한 외교 무대가 아니었다. 트럼프가 시간을 팔았다면, 시진핑은 시간을 샀다. 그 차이가 바로 ‘쫓기는 리더’와 ‘느긋한 전략가’를 갈랐다. 시장 관계자들은 그 균열선 위에서 새로운 아시아 금융 질서의 무게추가 서서히 중국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부산 김해공군기지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에서 취재진에게 “내년 4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이후 시 주석이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나 워싱턴에 답방할 것"이라며 자신이 먼저 중국으로 가서 시진핑을 만날 것이라 말했다.

김경목 기자 kkm3416@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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