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 2025-11-05 (수)

(장태민 칼럼) 트럼프의 'UPFRONT'

  • 입력 2025-09-29 14:47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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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처: 백악관

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처: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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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2025년 9월 25일.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금액 3500억달러(약 500조원)가 ‘업프런트(선불)'라고 했다.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TikTok)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EU, 일본, 한국으로부터 돈을 먼저 받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당시 "우리는 그동안 다른 나라들로부터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처럼 잘된 적은 없었다. 관세와 무역협정을 통해 EU에서는 9500억달러를 확보했고, 일본에서 5500억달러, 한국에서 3500억달러를 받는다. 모두 업프런트"라고 했다.

금융시장 등 주변에선 뭔가 올 것이 온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제기됐다.

일각에선 관세 협상이 당초 김용범 정책실장 등이 띄웠던 기대감과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조바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 7월, 김용범은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협상 잘 했다'고 했는데...

2025년 7월 31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한국과 미국이 상호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은 3500억 달러를 투자하며 이 투자는 '조선 1500억불 + 반도체 등 2000억불'이라고 했다.

자동차 관세 12.5%를 끝까지 주장했지만(FTA 체결국인 점을 감안해) 미국은 일괄 15% 적용을 고집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협상 결과는 주요국 대비 동등하거나 우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는 최혜국 대우를 받기로 했고 쌀, 소고기 등 농산물에 대한 추가 개방 얘기는 없었다고 했다.

미국과 조선업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으며 총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 협력 전용 펀드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선박, 건조, MRO,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를 포괄하며 우리 기업들 수요에 기반해 구체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또 조선 분야(1500억불) 외에도 반도체, 원전, 이차전지, 바이오 등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에 대한 대미 투자펀드도 2천억 달러 조성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기업이 전략적 파트너로서 참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미국 진출에 관심 있는 우리 기업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용범 실장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치열한 전략 조율 끝에 양국 간 의미 있는 합의가 도출됐다고 평가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안도했다.

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임기 초반 열심히 하는 이재명 정부 사람들의 협상 성과, 특히 김용범 실장의 <협상 결과는 주요국 대비 동등하거나 우월하다>는 말을 믿었다.

김용범 실장 자신은 문재인 정부 시절 기재부1차관(2019.08.~2021.03)을 맡아 일했던 경제정책 관련 베테랑이기도 했다.

■ 8월, 강유정은 '합의문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정상회담'이라고 했는데...

2025년 8월 25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한국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적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트럼프는 "한국에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숙청 혹은 혁명(Purge or Revolution)이 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걸 수용할 수 없고 한국과 거래할 수 없다. 나는 오늘 새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다. 이 문제에 대한 관심에 감사한다"는 글을 적어 한국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후 한미 정상회담은 잘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는 피스메이커, 이재명은 페이스메이커’란 식으로 미국 대통령을 띄우면서 '아부의 진수'를 보여줬다. 두 정상간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정부와 여당은 회담 결과를 '극찬'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이야기가 잘 된 회담이었다"고 국민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9월로 들어서면서 협상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 잡지와 '이상한 내용'의 인터뷰를 한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 9월, 해외매체 인터뷰서 '탄핵, IMF' 같은 거친 표현 쓴 한국 대통령

2025년 9월 18일.

이재명 대통령의 미국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 내용이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대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내가 동의를 하면 탄핵당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미국이 3500억달러 대미 투자펀드와 관련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다"면서 "미국 협상팀에 합리적인 대안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는 9월 3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이미 우리 정부도 협상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최소 강유정 대변인의 '합의문 필요 없을 정도..."는 거짓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후 다른 해외 매체와도 동일한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이 대통령은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도 "한국이 무역 협상에서 안전장치 없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한국 경제는 1997년과 같은 금융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기축통화국도 아니고 외환보유액이 4100억달러 정도인 한국이 통화스왑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전액 현금으로 투자하게 되면 IMF를 맞게 된다고 했다.

이후 이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은 커다란 걱정거리를 안고 9월 하순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를 찾아야 했다.

그런 뒤 우리 대통령은 마치 미국을 피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 총회 기간 트럼프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에 불참했다. 그 시간 대통령은 강경화 주미대사 내정자를 불러 저녁을 먹었다.

어색하더라도 그 시간 트럼프 얼굴을 한번 더 보고 다른 나라 정상들도 만나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대통령 참모진이 구상한 듯한 이상한 '전략적 거리두기'는 불길한 기운만 증폭시켰다.

■ 김용범 정책실장, 처음부터 분위기 파악 못한 것인가

2025년 9월 24일.

이날 김용범 실장이 한미 관세협상 타결을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설명에 나섰다.

김 실장은 이미 7월말 관세 협상 타결을 설명하면서 미국과의 한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펀드가 대부분 현금이 아닌 대출과 보증 형태로 구성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하지만 제80차 유엔 총회(9월 22~9월 25일) 참석차 대통령을 따라간 김 실장이 미국 현지에서 이 문제를 다시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우선 한·미 관세협상 타결을 위한 필요조건이 '무제한 통화스왑'이라고 했다.

충분조건은 '한국 국회 동의와 관련법 개정, 현금보다는 대출 및 보증으로 구성되는 대미 투자 펀드 구성'이라고 했다.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직접 투자는 현행 수출입은행법으로는 불가능하며, 국내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중요한 부담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 협상팀은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처럼 '상업적 합리성'을 기준에 두고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미국의 '3500억달러 모두를 현금으로, 미국이 지정하는 곳에 투자해야 하고, 투자로 얻는 수익의 90%는 미국이 갖겠다'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김 실장이 7월 협상 당시 뭔가 오해를 한 것은 아닐까.

이 문제와 관련해 김 실장 자신이 설명하기도 했다.

"국제 투자나 상례에 비춰볼 때 당초 합의한 3500억달러 투자액은 대출이나 보증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7월 협상 때 비망록에 적어뒀지만 미국이 MOU라고 보낸 문서에 판이하게 다른 내용이 있었습니다. 미국 측은 캐시플로라는 말을 썼는데 이를 들여다보면 상당히 에쿼티에 가깝게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협상 당시 용어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아 미국의 페이스에 말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한국이 캐시플로를 대출, 보증, 투자 등 포트폴리오 형태로 이해한 반면 미국은 전혀 다르게 판단했을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한국은 셋 중 가장 호구가 된 것일까...다시 시작하기

EU는 G7 국가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포함해 27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경제규모는 일본의 4배다.

트럼프는 이 경제권에서 9,500억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선전한 뒤 일본에게선 5,500억달러를 받는다고 했다.

EU와 일본의 상대적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일본은 EU에 비해 2배 이상 돈을 내는 셈이다.

트럼프는 또 한국은 3,500억달러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일본의 경제규모는 한국의 2.5배다.

한국이 '일본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비례해서 돈을 내면 2,200억달러가 적당하다.

결국 EU, 일본, 한국 중 한국이 경제규모에 비해 가장 많은 돈을 뜯기는 나라가 된 것이다.

올해 7월 한국의 대규모 미국 투자 협상 사실이 알려질 때만 하더라도,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선불, 현금 지급'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이 경제 덩치에 비해 크게 투자하는 것 역시 최근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트럼프나 러트닉 등 미국 관료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듣게 되면서 한국인들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선불로 내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트럼프는 계속 돈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7월 하순, 8월 하순, 9월 하순 한국은 연이어 미국 관세팀과 거친 협상을 했지만 상황은 더욱 꼬였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일본의 1/3에 불과하다. 한국의 원화는 준기축통화인 엔화와 달리 한반도를 벗어나면 별로 쓸모가 없다. 그래도 이런 한국의 최대 강점은 첨단 제조 경쟁력이다.

한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생돈'을 내주고 싶어도 내줄 수가 없다. 계속해서 조선, 원전, 이차전지, 반도체 등의 제조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윈윈을 모색할 수 밖에 없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10월 하순이면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한국의 홈그라운드인 경주에서 열린다.

한국은 다시금 국제행사 준비와 함께 트럼프 협상팀에 맞서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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