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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한국에만 있는 경제학 박사를 경제 바보 취급할 수 있는 방법

  • 입력 2023-09-08 14:06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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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전날 국회 본회의에서 재정정책을 여유있게 가져갈 수 없는 한국 상황을 유독 강조했다.

야당 의원이 여전히 '추경을 조금이라도 해 줄 수 없느냐'고 다그치자 오랜 경제관료 출신 총리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면서 "우리 재정 사정은 그간 빚이 400조 이상 늘면서 부채비율이 50%에 달한다. 이제 우리 재정은 지출 위주로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못박았다.

최근 한 총리는 야당 의원들에게 '공부 좀 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는 등 경제는 경제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희한하게도 국회의원 금배지를 다는 순간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능력을 자동으로 부여받는다.

야당 의원들이 '하나같이' 총리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미국 하버드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오랜기간 경제관료로 일한 총리지만 '돈 푸는 게 절대선(善)'인 야당의 능력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 오래전 민주당 총리 출신의 항변 '나는 변한 게 없다'...민주당은 과거의 민주당이 아니다

총리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민주당 정권'의 관료로 일했던 경험까지 소환해야 했다.

한 총리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 아래에서 일했던 경험을 언급하면서 '감성적 접근법'까지 구사했다.

현실 세계에선 감성이 이성을 이기는 법이니 총리는 야당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대화법까지 구상하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한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근무했던 4명의 총리의 생각이 모두 같았다. 그들은 건전재정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약자 보호하자는 철학을 공유했다"고 했다.

이 4명의 총리엔 물론 한 총리 자신도 포함돼 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엔 그래도 재정이 안정적으로 관리된 것을 아는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은 과거의 민주당이 아니며, 사람들의 성향도 많이 달라져 있다.

결국 감성적 접근이 먹히지 않자 '재정위기 상황'이라는 강도높은 말까지 여러번 꺼내야 했다.

총리는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재정 위기 속에 있다. 재정여건은 일본, 미국과 다르다. 꼭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야당이 '돈 좀 풀자'는 논리로 거론하는 '다른 나라는 되는 데 왜 우리는 안 되나'는 주장을 차단하기 위해 기축통화 개념까지 설명해야 했다.

총리는 "한국은 기축통화국 반열에 이르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화폐에 대한 수용성 문제 때문에 미국, 일본처럼 부채를 늘릴 수 없다"고 했으나 야당은 미국처럼, 혹은 일본처럼 못하겠다는 총리를 '경제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몰았다.

하버드 경제학 박사도, 오랜 경제정책 관료도 '공부를 안 해도 다 아는' 한국의 뛰어난 국회의원들을 만나면 한수 배워야 하는 것이다.

■ 총리 "정치적 이득 포기하고 하는 건전재정"...야당엔 전달되지 않는 '진심'

야당은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작성하면서 2.8%만 증액한 것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총리는 다시 차분하게 이미 상당히 망가진 재정 상황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란 점을 강조했다.

야당 의원들은 경제정책이 그런 식이니 윤석열 대통령의 인기가 없고 지지도도 낮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총리는 '인기없는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했다.

총리는 "우리 정부나 국민들은 좀더 허리띠를 졸라 메면서 새로운 성장동력 찾아야 한다"면서 더 이상 퍼주기 예산, 추경 이런 것들로는 한국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정부가 인기없는 긴축재정을 하는 만큼 '그 진정성'은 좀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총리는 "사람들은 선거의 해에 어떻게 재정지출을 긴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서 그 만큼 정치적 이득까지 포기해 가면서 건정재정을 위해 노력 중이라고 어필했다.

하지만 야당 의원들이 오히려 '건전재정의 도그마에 갇혔다'고 비난하자 한 총리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한 총리는 "무분별한 재정운용시 국가부도사태에 이른다. 어느 정치인이 마음대로 쓰고 싶지 않겠나. 중장기적 건전성 위해 인내하고 참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 돈 더 빌릴 여력와 위기에 대한 대비

펀더멘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빚을 내면 어느 순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국가부채가 이미 GDP의 50%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이다.

총리는 이 수준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를 말하기 위해 한국경제 최대 위기였던 IMF 사태를 소환했다.

총리는 "1997년 위기를 겪을 때 우리 국가부채의 GDP 비율은 11%였다. 그때 169조원을 차입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IMF 사태는 외환보유액이 고갈돼 대한한국이 국가 출범 이후 맞은 가장 큰 위기였다. 이 사태까지 거론한 이유는 그 때보다 국가부채 비율이 훨씬 높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재정이 건전해서 그나마 위기 해결의 방도를 모색할 수 있었다. 지금은 국가부채비율이 크게 올라가 있는 등 재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위기시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세수까지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추경을 통해 더 빚을 낸다면 한국의 나라 살림살이는 더욱 부실화될 수 있다고 했다.

■ 추경 중독과 미래 세대 착취

국가는 세금을 거둬서 나라 살림살이를 꾸린다.

하지만 올해는 국세가 작년보다 60조원 정도 덜 걷힐 것이란 예상도 나오는 등 형편이 좋지 못하다.

궁극적 해결책은 경기 상황이 좋아져 자연스럽게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걷으면 되지만, 인위적으로 경기를 어떻게 해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빚을 내 마중물로 잘 이용하면 경기도 좋아지고 국가 재정 상황도 호전될 수 있다. 물론 돈을 '아주 잘' 써야 종잣돈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수 의원들이 주장하는 현금을 나눠주는 식의 정책은 경기 활성화에 큰 효과가 없고 재정 상황만 더 어렵게 만들기 십상이다.

국채 발행으로 정책을 펼칠 때 그 효과가 제대로 나지 않으면 부채는 결국 미래 세대로 이전되고 만다.

한국은 이제 재정정책을 두고 기성 새대와 젊은 세대간 갈등도 나타난 상태다. 예컨대 기성 세대는 낸 돈에 비해 국민연금 등을 많이 받아가지만 젊은층은 그럴 수 없다. 나라가 빚을 내는 문제는 세대간의 책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 총리는 "여기서 재정을 더 풀면 더 높은 물가만 초래하고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증가시키는 일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야당 쪽에선 그렇게 돈을 더 푸는 일이 겁나면 '조금이라도 해 달라'는 부탁이 계속됐다.

법무장관을 지낸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추경 35조원까지는 아니더라도 15조원, 20조원, 아니 10조원이라도 편성해 달라. 눈꼽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총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 엄중한 국가재정 상황과 야당의 확장재정 주장

야당 의원들이 볼 때 한국은 재정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경제학을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여기서 빚을 더 낸들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안다는 식이다. 더 나아가 계속해서 '문재인 정부식 재정운영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정태호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무슨 방만한 재정운영을 했나. 코로나 때 경기만 잘 살렸다"면서 그 때의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윤석열 정부 때문에 경제가 '폭망'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마저 이 지경이니 경제가 말이 아니라고 했다. 풀어야 할 돈은 안 풀고 국민만 괴롭히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총리가 볼 때 이런 생떼는 어이없는 주장이었다.

한 총리는 문재인 정부가 재정정책을 잘 했다는 주장에 대해 "문제가 없어야 잘 했다고 할 수 있다. 재정건전성이 심대하게 타격을 입었다. 부채의 GDP 비율이 50%로 올라가 국제사회의 경고까지 받고 있는데 정말 잘 된 일로 보는가"라고 되물었다.

결국 이야기는 접점을 찾기 못했다.

재정정책에 대한 이론과 실무 능력을 인정 받았던 총리는 야당 의원들로부터 국민을 괴롭히는 '악당'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선량이 되면 누구보다 총명해지는 탓에 총리는 야당 의원 누구 하나도 설득하지 못했다.

■ 재정건전성, 의견 다른 우리끼리만 판단한다고 될 일 아냐

문제는 재정건전성 이슈에 대해 우리만 결론을 내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 후반부부터 한국의 재정 사정은 상당한 의심을 받았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 해외 신용평가사 등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누구도 빚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의심을 받는다. 사실 최근 수년 동안 성장률에 비해 한국의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 이전 민주당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부채를 GDP의 40% 이내로 해야 한다'면서 재정건전성을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2020년 4.15 총선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한 의원들은 '기본소득 공부 모임'을 꾸리는 등 세금을 많이 거둬 돈을 적극적으로 쓰는 일에 이전 민주당 사람들보다 훨씬 큰 관심을 보였다.

국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데다 '국민 세금 쓰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이 대폭 늘어나자 재정건전성에 대한 민주당의 접근법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져버린 것이다.

선진국 중 우리보다 부채비율이 높은 나라들도 있고 한국은 재정 사정이 좋으니 더 빚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하버드 경제학 박사는 자신을 '경제학 모르는 사람'으로 당차게 결론내리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현실을 말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하던 대로 (윤석열 정부가) 계속했으면 신용등급이 이미 낮아졌을 겁니다."

■ 지금 다시 과감하게 돈 풀면 외국인이 또 의심 한다

사실 추경 실시를 위한 법적 조건을 엄격하다. 하지만 이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지 오래됐다.

최근 수년간 추경은 연중행사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돼 버렸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그랬다.

이런 한국을 외국인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대외교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같은 나라에선 옳든 그르든 외국인의 시선도 중요하다.

예컨대 외국인이 한국이란 나라의 빚 규모를 문제삼기 시작하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진다. 기업들은 해외에 나가 자금을 조달할 때 더 높은 금리를 물어야 한다.

결국 재정건전성이 악화돼 버리면, 나중에 꼭 써야할 곳에도 돈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빚내서 쓰는 것을 좋아하면 종국적으로 빚을 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IMF는 매년 회원국의 거시경제, 재정상황, 금융상황 등 경제전반을 검토한다. 국가별로 경제상황을 검토해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달 5일엔 헤럴드 핑거 IMF 한국 미션단장이 추경호 경제부총리를 만나 지난 2주간 진행한 연례협의 결과를 설명했다.

이들의 버릇 중 하나는 반드시 한국경제에 대한 훈수를 둔다는 점이다. 이들의 훈수는 나중에 한국 평점을 매기는 데 기준 역할도 한다.

핑거 단장은 먼저 "한국은 반도체 경기 개선 등에 힘입어 올해 하반기부터 회복세를 강화될 것"이라는 덕담(?)을 한 뒤 한국 정부는 돈 푸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핑거는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에 맞춰 긴축적인 재정정책을 필치는 정책조합은 맞는 정책 세트(right set of policies)"라고 평가했다.

재정정상화를 위해 크게 늘리지 않은 내년 예산안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라고 했다.

다만 재정준칙 도입도 조속히 마무리하라는 숙제를 줬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 정도의 '큰 덩치'를 가진 주요국 중 재정준칙을 갖추지 않은 나라도 없다. 하지만 돈 쓰는 일에 진심인 거대 야당의 반대 때문에 법 통과가 늦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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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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