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조감도

(장태민 칼럼) 호남 반도체
이미지 확대보기[뉴스콤 장태민 기자] 연초 새만금 등 호남 지역에 반도체 산업의 기지를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AI 시대 한국경제의 앞날과 관련해 중요한 반도체 산단을 둘러싸고 정부, 정치권 일각에서 '호남 반도체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호남발전특위는 "삼성·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을 광주·전남 접경지에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전북 지역구 의원들은 시민단체까지 앞장세워 '반도체 클러스터 새만금 유치 추진 서명 운동'마저 벌이고 있다.
그간 한국의 산업전문가 등은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속도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진행이 더디다면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뜬금없이 '호남 반도체론', '반도체 호남 배분론'이 급부상했다.
■ 반도체 산단 '호남 배려론' 힘 받은 이유는...대통령 발언이 발단
작년 말부터 반도체 산단의 '호남 배려'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여기엔 이재명 대통령, 그리고 이재명 정부 관료들의 목소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천조원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 다른 목소리가 스며든 이유는 이재명 정부의 '호남 발전론' 때문이다.
우선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호남 반도체'에 힘을 실어준 측면이 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말(12월 10일)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용인 등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남부권으로 분산하고 이를 위해 규제 완화와 재정적 우대 조치를 포함한 획기적인 정부 지원책을 도입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반도체의 이전이나 호남지역으로의 확장이 자신의 '국가균형발전론'에도 맞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울러 호남지방의 재생에너지(RE100)와 연계하면 지역과 산업 발전 모두를 이룰 수 있다는 스탠스를 취하는 듯했다.
대통령의 이런 입장은 신설된 기후에너지환경부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느낌도 줬다.
대통령의 의견 표명 이후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반도체 클러스터를 새만금 등지로 옮기는 것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새만금에 '반도체까지?'라며 의구심을 표하는 반응들도 적지 않았다.
새만금은 넓은 부지와 항만이 있어 원료 수입·제품 수출이 중요한 이차전지와 데이터센터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따라서 이미 10조원 이상의 배터리 투자가 발표돼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새만금에 배터리 뿐만 아니라 반도체까지 집어넣는 게 맞는 방향일까?
■ 용인 산단, 닻 올렸는데...무르익는 호남 반도체에 대한 꿈
용인반도체클러스터와 관련해 SK하이닉스는 이미 팹 건축에 착수했다.
삼성 주도의 국가산단 역시 이제 막 토지 보상 절차에 들어섰다.
이런 때에 대통령과 정부 발언에 힘입어 '반도체 호남 분배론'이 급부상했다.
특히 올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호남 반도체'를 공약으로 내거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민주당 전북 의원 사이에선 첫 삽을 뜨고 보상이 진행 중인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쪼개서 새만금으로 보내자는 주장들이 엿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선 6월 지방선거 전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안호영 의원이 적극적이다.
안호영 의원은 7일 "저와 전북이 홀로 문제를 제기해 오던 용인 반도체 지방 이전에 전남이 힘을 보태면서, 이제 이 이슈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 의원은 "어제(6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 소속 이병훈 의원이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증설 팹은 호남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호남 반도체'가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사 기조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했다.
안 의원은 "대통령은 '자원의 집중과 기회의 편중은 이제 성장의 걸림돌'이라고 밝혔다. 용인 반도체의 지방 이전은 '수도권 중심 성장’에서 ‘지방 주도 성장’으로 전환하는 상징적 실천 과제"라며 "최근 광주·전남에 AI와 재생에너지 관련 대규모 사업이 집중되면서, 전북 도민들 사이에서는 상실감이 솔직히 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전북을 뒤따라 온 광주·전남을 지렛대 삼아 용인 반도체의 전북 이전을 이어가야 한다. 전남이 함께 움직일 때, 수도권의 벽도 넘을 수 있다"고 했다.
자신에게 스스로 '호남 반도체'를 위해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를 입혔다.
그는 "윤준병 전북도당위원장을 비롯한 전북 국회의원들과 똘똘 뭉쳐 전남보다 더 치열하게, 더 힘있게 싸워 수도권의 벽을 넘겠다"고 했다.
■ 반도체 산단, 지금은 '속도'가 생명인 시대
여당 내 반도체 호남 이전 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다.
하지만 이언주 민주당 수석 최고위원을 비롯한 4명의 용인 국회의원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용인 지역구는 모두 여당(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여당 내에서 반도체 산단 문제를 두고 '호남 대 수도권'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필자는 우선 호남지역 이전 시 속도가 걱정스럽다.
선거 때까지 논란이 거듭되면 현장의 혼란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는 사업 추진 속도를 더욱 늦출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세계가 치열한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기준으로 반도체 팹 건설이 하루 지연될 때마다 약 70억 원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고 한다.
지금 계획을 원점으로 돌리면 인허가 절차만 3~5년을 다시 밟아야 한다고 한다. 그 사이 TSMC와 인텔은 2나노, 1.4나노를 선점할 것이고 한국 반도체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반도체 엔지니어들 사이에선 새만금의 '지반 문제'과 '시간 문제'를 동시에 거론하기도 한다. 예컨대 반도체 노광 장비는 나노 단위 작업을 하므로 미세 진동에 극도로 민감하기 때문에, 새만금은 갯벌을 메운 매립지라 지반이 무르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또 이런 땅에선 깊은 곳까지 파일을 박는 난공사가 필요하고, 이는 공사비 폭등과 공기 지연을 부를 수 밖에 없다고 염려한다.
아무튼 한국이 '반도체의 시간'을 허비하면 국가 경제의 미래는 없다.
한국 경제의 명운이 걸린 '반도체 산단'을 지역 균형발전 논리로 뒤엎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 짝이 없다.
■ 반도체, 새만금 등에 판을 새로 까는 게 맞는 것인가
전북 국회의원 사이에선 "용인 반도체의 전북 이전은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식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민주당 호남 의원들 사이에선 또 "이번 결정이 전북의 산업 지형과 대한민국 성장 방향을 바꾼다"는 식의 발언이 오가고 있다.
필자는 그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늦은 속도'를 우려했던 사람이다.
이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도체 호남 배려' 문제까지 터져 착찹하기 그지 없다.
여기서 따져볼 일은 과연 '호남 반도체'가 효율적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반도체 산단은 경기지역을 축으로 형성돼 있다.
삼성전자는 수원-기흥-화성-평택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축에 있다. SK하이닉스는 이천-청주-용인을 잇는 중부고속도로 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축을 기준으로 수천 개의 협력사가 분포돼 있다. 이런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이미 '수십년'이 걸렸다.
반도체는 부품의 실시간 조달 등을 위해 서로 붙어 있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새만금 등에 새로 만드는 것보다 이 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하는 게 '시간 절약'이나 글로벌 경쟁에서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최근 새로 입주한 업체들 역시 경기 지역 반도체 산단에 터를 잡고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너무나 유명한 EUV 노광장비 업체 ASML은 경기도 동탄에 사옥을 지었다.
동탄이 지역구인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삼성과 하이닉스를 지원하는 글로벌 소부장 기업들이 동탄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장비가 멈추면 분당 수억 원이 날아가기 때문에 '1시간 내 대응'이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면서 "시장이, 기업이, 기술이 이미 경기 남부를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산업단지를 잘못 쪼개면 비효율이 커져 경쟁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
지금은 반도체 벨트에서 용인을 새만금으로 떼어낼 게 아니라 이준석 의원 말처럼 동탄역을 중심으로 평택, 화성, 용인, 이천을 고속으로 잇는 '반도체 철도'를 과감하게 추진하는 게 맞아 보인다.
이 의원은 "그렇게 되면 남사와 원삼의 반도체 산업단지는 동탄역 광역비즈니스콤플렉스의 업무지원 기능, 동탄2신도시의 우수한 주거환경과 시너지를 내며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태계로 완성된다. 소모적인 이전 논쟁을 멈추고 이 연결과 완성에 정치권이 뜻을 모을 때"라며 "동탄은 용인 클러스터의 배후 도시이자, 대한민국 반도체 인재 3만 명의 보금자리"라고 했다.
■ 태양광·풍력에 많은 국민들 속고 있다
'호남 반도체'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논거가 "호남에 태양광 전기가 남아도니 공장을 호남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우선 큰 그림에서 신재생이 한국 산업의 미래를 망칠 위험이 크다고 본다.
필자는 특별히 태양광, 풍력에 악감정이 없다. 문제는 한국이라는 좁은 땅 덩어리에서 생산되는 태양광, 풍력에너지들은 가격이 비싼 데다가 질마저 좋지 않다는 점이다.
반도체나 AI를 위해선 싸고 질 좋은 전기가 필요하다.
2020~2025년 평균 에너지 단가를 보면 원자력 58원, 태양광 130원, 풍력 128원, 수력 140원 수준이었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에너지 단가가 이보다 대폭 올랐다.
한국 산업구조는 제조업과 첨단산업이 중심이다. 세계 제조업 중심지 중 한 곳인 한국은 '태생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나라다. 따라서 싸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한국은 원전이 주력 전원이 되고 재생에너지가 이를 보완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비싸고 질 안 좋은 신재생으로 가려는 행태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 하바드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한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호남의 태양광 전기'는 반도체에 맞지 않다고 질타한다.
"중요한 것은 전기의 질입니다. 나노 공정 장비는 전압과 주파수가 아주 미세하게만 흔들려도 멈춥니다. 실제로 삼성전자 평택 공장은 2018년 30여 분간의 정전으로 500억 원 이상의 웨이퍼를 폐기했습니다. 날씨 따라 발전량이 들쑥날쑥한 태양광은 주파수 안정도가 떨어집니다. (호남 국회의원들의 말대로) 정말 에너지 비용과 송전망이 문제라면 태양광의 호남이 아니라 원전이 밀집한 울산·경주로 가야 맞습니다."
아울러 한국경제가 살기 위해선 RE100이나 신재생에 대한 명목적인 신뢰를 버려야 한다.
이 의원은 "RE100은 공장이 태양광 패널 옆에 있어야 인정받는 게 아니다. 전력망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용인에 공장이 있어도 호남의 태양광 발전 사업자와 전력수급계약(PPA)을 맺거나, 녹색프리미엄·REC 구매를 통해 얼마든지 RE100 이행을 인정받을 수 있다. 전기가 있는 곳으로 공장을 옮기라는 주장은 산업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반도체 산단 위치 문제와 관련해선 기업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느 지역에 공장을 지어야 '생산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또 기업들이 용인을 택한 데엔 '고급 인력'의 문제 역시 크게 작용했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직원은 "반도체엔 핵심 인재도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수도권을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지역 균형발전론, 혹은 특정 정치인·정부관료의 '애향심'이 그릇된 판단으로 이어지면 국가의 중대 산업, 더 나아가 한국경제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