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 2026-05-14 (목)

(장태민 칼럼)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논란

  • 입력 2026-05-13 11:28
  • 장태민 기자
댓글
0
(장태민 칼럼)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논란이미지 확대보기
[뉴스콤 장태민 기자]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국민배당금' 이슈로 한국사회에 큰 혼란을 주고 있다.

김 실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AI 시대의 기술 독점과 부의 양극화를 우려하며, 기업의 AI 기반 초과 이윤을 전 국민에게 환원하는 '국민배당금' 설계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당장 국민의힘 등 야권은 김 실장 사퇴를 주장했다.

야당은 김 실장이 공산주의, 사회주의적인 발상을 하고 있다면서 그의 즉각 경질을 요구했다.

김 실장의 국민배당금 발언이 논란이 되자 청와대는 일단 '김 실장 개인 의견'이라며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제안은...

김용범 실장은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글을 올렸다.

글의 핵심은 AI 산업 호황으로 발생할 '구조적 초과이윤'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국민배당금' 체계를 미리 갖추자는 것이었다.

김 실장은 "AI 시대의 결실은 특정 기업만의 성과가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 결과"라며 "그 과실을 국민에게 환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기업의 이익을 강제로 뺏는 횡재세가 아니라, 산업 호황으로 자연스럽게 늘어난 법인세 초과 세수를 원칙 없이 소진하지 말고 체계적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라며 "환원된 재원을 어디에 쓸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했다.

그는 환원된 재원을 청년 창업 자산, 농어촌 기본소득, 예술인 지원, 노령연금 강화, AI 전환 교육 계좌 등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초과이익 일부를 배당금 형태로 지급하는 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전환 비용을 완화하는 체제 유지 비용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김 실장의 제안이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다보니 여당 측에선 뜸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청래 여당 대표는 13일 기자회견에서 "김용범 실장 발언(국민배당금)은, 학계에서 먼저 그런 부분을 연구하고 학문적 고찰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학문적 고찰 통해 현실 접목 의견이 나오면 취합해서 정책화하고, 국민과 소통할 필요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 국민의힘 지도부, 김용범 실장 '공산당식 발상'이라며 맹비난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김용범 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에 대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며 발끈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12일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정부가 강제로 뺏어서 나눠주겠다는 것이냐"며 "공산당 본색이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장 대표는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을 정부가 가져가 나눠준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 배급 경제"라며 현 정부가 체제를 바꾸려 한다고 한다고 우려했다.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으로 야당의 '경제통'인 송언석 원내대표는 "정책실장의 발언이 자본시장 불안을 초래해 코스피 급락을 일으켰다"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해명하고 김 실장은 즉각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야당의 경제통인 박수영 국민의힘 재경위 간사는 "기업의 초과이익을 전 국민에게 나누자는 주장은 '기업이익 배급제'와 다름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에 태우려 하느냐"고 우려했다.

■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추가세수, 국가재정법 제90조 철저히 지켜 나라 빚갚는데 쓰는게 우선"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김용범식 국민배당금'이 논란이 되자 일단 정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실적에 기여한 것은 없다면서 사기업에게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 대표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2022년 초부터 시작 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호황에 이재명 정부가 기여한 것은 없다"면서 "오직 두 회사 임직원의 땀과 '5만전자' 소리를 들으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묵묵히 투자해 온 주주들이 어려운 시절을 인고해온 세월이 있기에 오늘의 호황이 그분들의 보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적었다.

일 잘하는 당나귀 과적해서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황금알 낳는 거위를 치킨 튀겨먹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5년 단임제 정부가 보통 빠지는 유혹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기업은 그 이상의 타임라인에서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형씨, 요즘 장사 잘되지? 이게 다 우리 동대문 사단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혼자만 잘 먹고 살지 말고 사단에 돈 좀 싸게싸게 내라고'. 이건 정치가 아니다. 야인시대 우미관식 정치"라고 적었다.

기업이 구성원에게 성과를 나누고, 주주에게 배당하고, 국가가 법률로 정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책임'을 정부가 강제하려는 시도가 바로 반기업정책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는 첨단기술 경쟁 시대에 '한가하게 나눠먹을 궁리만 한다'고 개탄했다.

이 대표는 "지금 미국을 보라. AI 호황 속에서 단 한 개의 기업이라도 더 유치하려고 주(州)들이 앞다투어 세금을 깎아주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면서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 삼성 당나귀와 하이닉스 당나귀 위에 어떻게 하면 짐을 더 얹을까 궁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업의 경영은 자율에 맡겨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하지만 IT계열 출신으로서 한번 쯤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야인시대 이재명 사단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이 호황의 실탄을 공격적인 재투자에 쏟아붓는 모습"이라며 "미국의 IBM이나 Texas Instruments 같은 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하거나 과감히 인수해, 대한민국 향후 수십 년의 먹거리가 될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승수효과를 내주는 모습"이라고 적었다.

그는 "당나귀가 더 멀리 갈 수 있게 짐을 덜어주고, 거위가 더 많은 알을 낳도록 모이를 준다"면서 "추가세수가 생길 것 같으면 우미관식 마인드로 매표할 생각보다 국가재정법 제90조를 철저히 지켜 나라 빚갚는데 쓰는게 우선"이라고 일갈했다.

■ 여당 경제통 안도걸의 '김용범 엄호하기'

이재명 정부 경제정책을 끌고 가는 김용범 정책실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모두 문재인 정부 때 '기재부 차관'을 했던 사람들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기재차관을 역임했던 또 한 사람인 안도걸 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으로 변신해 당에서 경제통 역할을 맡고 있다.

안 의원은 김용범 실장이 야당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즉각적인 방어에 나섰다.

안도걸 의원은 12일 "일부 야당 의원이 김 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을 두고 사회주의식 기업이익 배급제, 반기업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주장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과도한 정치공세"라고 주장했다.

김 실장의 발언 취지는 명확하다고 했다.

AI·반도체 산업의 초호황으로 대규모 법인세 초과세수가 발생할 경우, 그 재원을 아무 원칙 없이 단기적으로 소진하지 말고 국가 차원의 전략적·체계적 활용 원칙을 미리 설계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 이익을 정부가 강제로 나눠 갖자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안 의원은 "기업은 이미 법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그 세수는 당연히 국가 재정으로 편입돼 예산을 통해 사용된다. 김 실장의 제안은 그 '사용처와 원칙'을 사전에 공론화하자는 것이지, 기업의 경영권이나 배당 정책에 개입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를 두고 마치 정부가 기업에게 '이익을 국민에게 직접 배당하라'고 강제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명백한 논점 일탈이라고 했다.

기업 활동을 통해 발생한 초과세수가 국가재정에 편입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적 재정 시스템이며, 그 재원을 미래세대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논의하는 것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정책 담론이라고 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안 의원은 "다가올 AI·반도체 슈퍼사이클 속에서 초과세수가 실제 얼마나 발생할지, 그 규모가 일시적 경기 요인인지 구조적 변화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재원을 어디에 투자해야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지 차분하게 논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청년 창업과 AI 인재양성에 투자할 것인지, 지역균형발전과 농어촌 재생에 활용할 것인지, 국민연금·노후안전망 강화에 쓸 것인지, 미래전략산업 투자 재원으로 적립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충분히 가치 있는 과제라고 했다.

그는 "노르웨이가 석유 호황의 과실을 국부펀드로 축적해 미래세대 자산으로 전환했듯이, 우리 역시 AI·반도체 시대의 초과 과실을 어떻게 국가적 자산으로 전환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를 두고 색깔론을 덧씌워 '사회주의'라고 공격하는 것은 미래전략 논의를 정쟁으로 몰아가는 소모적 정치에 불과하다고 우려했다.

안 의원은 "지금 필요한 것은 이념적 낙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과실을 어떻게 국민 전체의 미래 역량으로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하고 책임 있는 토론"이라고 했다.

■ 한국 메모리 '분배 논란' 벌일 때인가...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

5월 초 김용범 정책실장은 '이재명 정부 금융정책' 관련 글을 통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김 실장은 이달 1일 <금융의 구조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하나의 질문이 금융을 떠돌고 있다.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은 가장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은 가장 비싼 돈을 써야 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금융의 기본인 '금리의 세계'에선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이 높은 이자를 문다. 김 실장은 이 당연한 '금리 테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람들을 논쟁의 틀로 끌어들인 바 있다.

사실 김용범 실장의 그 글 '시작'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 실장이 최근 금융에 대해서 쓴 글이 공산당선언에서 따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948년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첫 문장은 그 유명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로 시작된다.

김 실장이 맑스의 문장을 본 떠 '하나의 질문이 금융을 떠돌고 있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 뒤, 얼마 뒤 '국민배당금' 혼란까지 키운 모양새다.

아무튼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역대 최고 실적에 상당수 한국인들이 정신을 잃고 일탈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당장 삼성전자는 노조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노조는 수억원의 성과급을 내놓으라면서 '일회성'이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매년 영업이익의 15%를 못 박자는 식이다.

주주 자본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이 볼 때 삼성전자 노조의 주장은 '경영에 대한 월권 행위'이며, 거위의 배를 가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이런 혼란한 때에 한국의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하는 청와대 정책실장이 자신이 페이스북에 '감성적인 글'을 올리면서 논란을 키웠다.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반도체 업체들이 큰 돈을 버는 게 단순히 한국 업체들이 잘 대응했기 때문인가?

냉정하게 얘기해서 최근 한국 메모리(반도체)가 잘 나가는 이유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실패에 따른 기가 막힌 운(運)' 때문이다.

수급 불일치가 심각하게 일어난다는 얘기는 그 산업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렇게 돈을 벌지 몰랐다.

AI 산업의 급성장과 그에 따른 공급 부족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유례없는 실적을 안겨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수급 불균형은 시간이 지나면 해소되는 게 일반적이다.

수급 혼란에 따라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 때문에 돈을 벌었다고 착각하면 십중팔구 망한다. 수급 마찰에 따른 한국 반도체의 호황이 천년만년 지속될 리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한국 반도체가 '운' 때문에 큰 돈을 벌고 있으니, 기업들은 이를 적극 활용해 미래 먹거리 투자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때다.

하지만 삼성 노조도, 정부도, 정치권도 그저 '지금' 호황인 한국 반도체에 숟가락만 얹으려 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 참고자료, 논란이 된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페이스북 글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기존 경기순환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자꾸 어긋난다. 수출이 좋다, 반도체가 호황이다, 코스피가 오른다 —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혹시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업황 회복이 아니라 ‘산업구조’와 ‘국가구조’가 동시에 재편되는 과정은 아닐까?

이 글은 이 파격적인 가설에서 출발한다.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 인프라다. 그리고 그 인프라 전환의 중심에 한국이 있다. 만약 이 초기 가설이 맞다면, 한국은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순환형 수출경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구조적 희소성과 지속적 초과이윤을 기반으로 한 ‘기술독점경제에 가까운 구조’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성장률이나 주가 수준을 넘어, 국가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동시에 나타나는 흐름들 — 반도체 산업의 위상 변화, AI 인프라 경쟁,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문제가 국가 전략 의제로 올라오는 현상, 그리고 한국 자산시장 재평가 움직임 — 을 함께 놓고 보면 기존 경기순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의 조짐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른 시기에 이 가능성을 논의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 이번은 다르다 — AI 수요 구조의 비가역성

“이번은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 — 역사상 가장 많이 틀린 말 중 하나다. 닷컴 버블도, 일본 부동산도, 중국 성장론도, 미국 서브프라임도 모두 이 말과 함께 왔다가 무너졌다. 그 냉소는 필시 이 글에도 향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역사 속 “이번은 다르다”의 실패는 거의 다 자산 ‘가격’ 이야기였다. 집값, 주가, 멀티플, 버블 — 가격이 구조를 앞질러 달려가다 무너진 것이다. 이 글은 가격을 말하지 않는다. 공급망 구조, 물리 인프라, 지정학, 메모리의 전략 자산화 — 체제 전환 가설이다.
한편 진짜 체제 전환은 대개 새로운 산업이 불쑥 등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산업의 전략적 위치가 바뀌는 방식으로 온다. 석유도 원래 검은 액체였고, 메모리도 원래 범용 부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AI 반도체 수요를 기존 메모리 사이클의 연장선에서 해석한다. 202122년 호황, 202324년 조정, 그리고 다시 찾아온 호황 — 과거 패턴에 익숙한 시각에서는 지금 역시 언젠가 꺾일 순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수요는 구조가 다르다. 초기 AI 투자는 학습 중심의 데이터센터 확장에서 출발했지만, 수요는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추론 인프라, AI 에이전트, 소버린 AI,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피지컬 AI와 로보틱스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레이어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중요한 점은 각 레이어가 이전보다 더 높은 메모리 집약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레이어가 추가될수록 수요는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으로 누적된다.
AI 인프라는 일회성 설비 투자가 아니다. 한번 구축된 인프라는 지속적인 업그레이드 수요를 만든다. 성능·전력효율·집적도가 동시에 개선되는 HBM 같은 제품은 세대 교체가 필수적이다. 스마트폰 교체주기처럼 수요가 포화되는 구조가 아니라, 인프라 자체가 계속 새로운 수요를 생성하는 구조다. 이것이 이번 국면이 과거 메모리 사이클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다.

• AI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산업 인프라다

AI를 기존 인터넷 산업의 연장으로 보면 많은 숫자가 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AI를 전기·철도·통신망 같은 산업 인프라 전환으로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AI는 단순히 앱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데이터센터, 전력망, 냉각, 변압기, 로봇, 산업 자동화, 도시 인프라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물리 시스템이다. AI가 클라우드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세계로 내려올수록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만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 전력 장비, 배터리, 정밀기계, 센서, 디스플레이, 로보틱스 제조 역량 같은 물리적 공급망 전체가 중요해진다. 이 전환은 글로벌화 시대의 가벼운 경제에서, 다시 산업 역량이 핵심이 되는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 왜 한국인가 — 풀스택 제조 역량의 희소성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AI 모델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누가 AI 인프라를 실제로 공급할 수 있는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은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다. 미국은 설계와 플랫폼에서는 압도적이지만 제조 기반이 제한적이다. 중국은 대규모 제조 역량을 보유했지만 지정학적 신뢰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소재와 장비에 강점을 갖고 있고, 독일은 기계와 화학에 강하다. 대만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정밀 제조, 전력 장비, 산업 자동화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을 통합적으로 보유한 드문 나라다. 어느 것 하나 빠진 게 없는 팔방미인에 가깝다.
이것은 단순한 산업 경쟁력이 아니다. 공급망 주권이 국가 전략의 핵심 변수가 되는 시대에, 이런 제조 역량은 지정학적 레버리지에 가깝다. AI 인프라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수록, 한국 산업 생태계의 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커진다.

다만 이런 변화는 북해유전처럼 누구나 즉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안에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는 변화는 대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때 이미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인식된다. 인간은 선형적 변화에는 익숙하지만 체제 전환에는 둔감하다.
더구나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은 원래부터 한국이 해오던 산업이다. 같은 산업처럼 보이는데 왜 이번에는 특별한가를 설명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 단계에서는 이 논지가 과장된 낙관론처럼 들릴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반응이다.

• 순환형 수출경제가 기술독점적 경제구조로 전환 가능한가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전형적인 순환형 수출경제로 움직여 왔다. 수출이 좋아지면 성장률이 올라가고, 글로벌 경기 둔화가 오면 빠르게 꺾였다. 과거 한국 제조업은 항상 경쟁 심화, 중국 추격, 마진 압박, 대규모 설비투자 부담 속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AI 인프라 산업은 성격이 다르다. 높은 기술 장벽, 극소수 기업 중심 구조, 국가안보 공급망, 지속적 업그레이드 수요라는 특징을 동시에 가진다. 메모리가 단순 범용재가 아니라 전략 인프라 레이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AI 시대의 메모리·인프라 수요가 장기 구조 변화라면, 한국은 처음으로 지속적 초과이윤을 생산하는 국가에 가까워질 수 있다. 순환형 수출경제에서 기술독점적 성격이 강한 경제구조로의 이동 — 이것이 지금 한국 앞에 열려 있는 가능성의 핵심 본질이다.

• 거시경제 변수의 재설정

이 변화가 현실화되면 기존 거시 변수들의 균형점도 달라진다.

기존 통계 체계는 AI 메모리 산업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성능·집적도·전력효율이 동시에 개선되는 산업에서는 가격 변화와 품질 개선을 분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 결과 기업 이익은 폭증하는데 실질 GDP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보이는 괴리가 반복될 수 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명목 GDP, 무역수지, 기업 영업이익, 그리고 국민의 구매력(교역조건) 변화다.

무역흑자가 구조적으로 확대되면 원화는 장기적으로 강세 압력을 받는다. 원화 강세는 수입물가를 낮추고,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일부 상쇄한다. 높은 명목 성장,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물가, 강한 통화, 자산가격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새로운 거시 국면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한국형 골디락스 국면이다.
이 경우 한국의 1인당 GNI는 중장기적으로 OECD 상위권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다. 국가의 위상, 자산가격 체계, 국민의 소비 구조, 글로벌 인재 흐름까지 모두 바꾸는 변화다.

• 그러나 K자형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여기서 멈추면 절반의 분석에 그친다.
AI 시대의 초과이윤은 속성상 집중된다. 메모리 기업 주주, 핵심 엔지니어, 수도권 자산 보유자처럼 이미 생산자산에 접근한 계층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매우 큰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상당수 중간층은 원화 강세에 따른 구매력 개선, 제한적 재정 이전, 일부 자산 상승 정도의 간접효과만 누릴 수 있다.
나라는 부유해져도 그 부의 분포는 자동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한국은 그간 성장에는 강했지만, 성장의 과실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는 약했다.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단순한 성장률이 아니라, 초과이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안정화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 AI시대 한국형 국가의 재설계

기존의 해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공일자리 확대, 다른 하나는 복지 이전지출 확대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가 루틴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에는 단순 고용 유지 중심 정책만으로 장기적 활력을 만들기 어렵다. 공공일자리는 AI가 대체할 일자리를 세금으로 연장하는 것에 가까워지고, 그것은 분배가 아니라 유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방식이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가 그 전환 비용을 어떻게 지원하는가다. 여기서 두 개의 축이 나온다. 창업과 문화다.

AI 도구의 민주화는 창업의 진입장벽을 빠르게 낮추고 있다. 과거에는 자본과 조직과 기술 인력이 있어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개인의 아이디어와 판단력이 훨씬 중요해지고 있다. AI는 소규모 팀에게 과거 대기업 수준의 생산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누구에게나 생애 1회 창업 기회 보장, 실패 후 재기 안전망, AI 기반 창업 교육, 지역 단위 창업 인프라 구축 같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다. ‘창업 as a success’가 아니라 ‘창업 as an experience’로의 문화 확산. 이것은 단순 복지가 아니라 AI 시대 생산성 정책이다. 공공일자리 예산의 일부를 여기로 돌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분배 효과를 만든다.

문화는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다. AI가 생산과 실행을 대체할수록 인간에게 남는 것은 관계, 감각, 표현, 의미 같은 영역이다. 문화는 AI 시대의 주변 산업이 아니라 인간 고유 영역에 가까워진다.

한국은 이미 K컬처를 통해 세계적 문화 생산 역량을 증명했다. 예술 지원, 콘텐츠 산업, 로컬 커뮤니티, 창작 생태계를 단순 여가 정책으로 보는 시각은 AI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문화는 분배 정책이자 전략산업이다. AI 시대에 인간다운 삶의 밀도를 설계하는 것이 곧 국가 경쟁력이 된다.

저출생·고령화는 이 모든 시나리오의 가장 큰 구조적 제약이다. 이민은 선택이 아니라 전략 변수다. 위로는 AI·반도체·로보틱스 분야의 글로벌 기술인재를 끌어와야 한다. 풀스택 AI 인프라 생태계가 있는 나라이니 인재가 몰릴 가능성이 생겼다. 창업비자, 영주권 패스트트랙, 기술인재 특별 트랙을 만들면 한국은 아시아의 새로운 인재 허브가 될 수 있다.

아래로는 고령화 사회에서 필수 노동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돌봄 인력이 필요하다. 단순 노동 수입이 아니라 정주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 (가칭) 국민배당금 — 새로운 사회계약

앞의 논지들을 수긍한다면, 재정 문제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AI 인프라 공급망에서의 전략적 위치가 구조적 호황을 만들고, 그것이 역대급 초과세수로 이어진다면 —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당 고민해야 할 설계의 문제다.

한국은 이미 비슷한 장면을 경험했다. 2021~22년 반도체 호황기의 초과세수는 사전에 설계된 원칙 없이 그때그때 소진됐다. 이번 사이클의 규모는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클 가능성이 있다. 그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천재일우의 역사적 기회를 허비하는 일일 수 있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존재한다. 초과세수로 국가부채를 줄이자는 주장도 가능하고, 국부펀드 형태로 장기 비축하자는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한국은 이미 상당한 외환보유고와 KIC 같은 국부펀드 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단순한 국가 재무건전성만이 아니다. AI 시대의 초과이윤이 사회 내부의 K자 격차를 구조적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초과이익의 일부를 현세대의 사회 안정성과 전환 비용 완화에 사용하는 것 역시 단순한 분배가 아니라 체제 유지 비용의 성격을 갖는다.
여러 참고모델이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석유 수익을 국부펀드에 적립하고, 그 운용 수익을 재정 원칙에 따라 사회 전체에 환원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자원 호황을 일시적 횡재로 소비하지 않고 장기적 사회 자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한국이 처한 상황은 성격이 다르지만 질문은 같다. 구조적 초과이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제도화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그 원칙에 가칭 ‘국민배당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핵심은 개별 프로그램이 아니라 원칙이다.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다.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그 과실의 일부는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 이것이 설계의 정당성이자 원칙이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이 원칙 위에서 논쟁해야 한다. 청년 창업 자산으로 갈 것인가, 농어촌 기본소득으로 갈 것인가, 예술인 지원으로 갈 것인가, 노령연금 강화로 갈 것인가, 아니면 AI 시대 전환 교육 계좌로 갈 것인가 — 이것은 열린 질문이다. 백가쟁명식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교화해야 할 설계의 영역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프로그램의 형태를 둘러싼 논쟁은 앞의 논지를 수긍한 다음에야 의미가 있다. 논지를 건너뛴 채 개별 프로그램만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초과세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국민배당금은 허황된 이야기다. 그러나 논지가 맞다면, 아무 원칙 없이 그 초과이익의 과실을 흘려보내는 것이야말로 더 무책임한 선택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최근 대통령을 면담한 데미스 하사비스는 AI 시대에는 기업이든 국가든 ‘새로운 경제모델’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조언을 남겼다.

어쩌면 한국은 그 변화가 가장 먼저 압축적으로 도착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AI 인프라 생산 역량, 초고속 디지털 사회, 저출생·고령화, 수도권 집중, 제조업 기반, 문화 산업 — 앞으로 많은 나라들이 겪게 될 문제들이 한국에는 이미 동시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시작되는 고민은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AI 시대의 초과이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분배할 것인가. 기술혁명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 창업·문화·이민·복지를 어떤 새로운 균형으로 묶어낼 것인가. 우리가 먼저 고민하고 토론하며 만들어내는 모델이, 나중에는 AI 시대 국가들의 하나의 표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 한국 앞에는 드문 역사적 가능성이 놓여 있다. AI 인프라를 공급하는 나라를 넘어, AI 시대의 초과이윤을 인간의 삶으로 환원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될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지금부터의 선택이 한국을 다시 평범한 순환형 수출경제로 되돌릴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산업국가로 밀어올릴 수도 있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 저작권자 ⓒ 뉴스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로그인 후 작성 가능합니다.

모바일화면 이동